LG의 역사 연재11편] 미완의 그릇을 갈고 닦아 인재로 빚다
- LG 역사와 경제
- 2018. 4. 18.
LG의 역사 연재11편] 미완의 그릇을 갈고 닦아 인재로 빚다
LG는 '럭키는 사람이 재산'이라고 했던 창업회장의 인재철학을 70년 동안 고스란히 물려받아 계승,발전시켜왔다. 국내 민간기업 최초로 대졸 신입사원 공개 채용을 실시하며 우수인재 확보 방식을 선도한 LG는 뛰어난 연구개발 인재를 모으기 위해 구본무 회장부터 각 계열사 CEO들까지 총출동하는 'LG테크노콘퍼런스'를 국내와 해외에서 개최하고 있다. 그룹 연수원 '인화원'을 건립하여 인재 육성에 힘쓰는 것도, 미완의 큰 그릇을 갈고 닦는데 가치를 두는 '인재 육성'철학의 산물이다.
미국 샌프라시스콜에 있는 하얏트 호텔 'LG테크노콘퍼런스 2016'행사가 사흘동안 진행이 되는데, 동부 하버드대부터 서부 스탠퍼스대까지 미국 전역의 명문대에서 공부하는 한국인 이공계 석박사 300여명이 모여들었다. 개별 초청장을 받고 날아온 인재들은 LG전자, LG디스플레이, LG화학 등 주요 경영 비전에 대해 직접 설명을 들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손을 직접 잡으며 "여러분이 LG에 오신다면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한 자산으로 여길 것"이라고 진심을 담아 전하는 구본무 LG그룹 회장의 말은 이들로 하여금 LG에 입사하여 꿈을 펼치고 싶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LG의 미래는 R&D에 달려 있다"고 강조하는 구본무 회장은, 2012년에 처음 시작되어 매년 국내와 해외에서 열리는 'LG테크노콘퍼런스'에 한번도 빠지지 않고 직접 전면에 나서고 있다. 사업에 필요한 인재가 있는 곳이라면 CEO도 나서서 어디든지 가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강조하는 구본무 회장은, 좋은 인재의 선발을 유비가 제갈공명을 얻기 위해 '삼고초려'한 것에 비유할 정도다.
이와 같은 인재 철학을 바탕으로 각 계열사 CEO들은 직접 해외를 돌아다니며 인재를 확보하고 있다. 이런 노력이 바탕이 되어, 'LG테크노콘퍼런스'를 시작한 2012년 이후 지금까지 LG의 R&D 인력은 32% 증가하였고, 성장 사업을 중심으로 세계 시장 선도를 R&D 성과를 지속적으로 내고 있다.
"기업은 인재의 힘으로 경쟁하고 인재와 함께 성장한다, 기업의 궁극적 목표인 인류의 번영과 복지도 인재의 빛나는 창의와 부단한 노력에 의해서만 이룩될 수 있다. 인재 육성은 기업의 기본 사명이자 전략이요, 사회적 책임이다."
국내 민간기업 최초로 실시한 대졸 신입사원 공개채용
1950년대 폭발적인 성장세를 거듭하던 락희화학은 가장 시급한 과제 중 하나는 다름 아닌 인재 확보였다. 초기 20명 안팎이던 종업원 수가 50년대 후분에 이르러서는 660여명에 달할 정더로 급속히 늘었지만, 한번세를 타고 걷잡을 수 없이 뻗어 나가는 사업을 감당하기엔 역부족이었다. 특히 회사의 성장을 견인할 만한 우수한 인재의 필요성이 절실했다. 여러 가지 의견을 검토한 구인회 회장은 대학을 갓 졸업한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시험을 쳐서 인재를 뽑자는 아이디어를 채택한다. 영세한 초창기 기업이라면 모를까 성장한 후에도 폐쇄적인 틀을 벗어나지 못하면 더 크지 못한다고 여겼던 것이다.
"우리도 이제 천하의 수재를 모두 끌어모으는 기라."
총명하고 활동력 있는 젊은이를 좋아하던 구인회 창업회장은 공개채용 방침을 확정하고 나서 들뜬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국내 민간기업 최초로 대졸사원 공개채용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락희화학에서 처음 실시된 대졸 신입사원 공개채용은, 1956년 여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과 법과대학에서 우수 졸업생 3명을 추천받아 필기시험과 면접을 거쳐 선발하는 데서 출발하였다. 이후 공개 전형 방식으로 전환하여 1957년 3월 2차로 공개채용을 실시한다. 당시만 해도 민간기업의 대졸 신입사원 공개채용이라는 선발 방식 자체가 극히 드문 시절이라 락희화학의 공채 광고는 장안의 화제였다. 이렇게 공개채용으로 입사한 대졸 신입사원들은 모두 전례 없는 특별대우를 받았다. 공장생활의 편의를 위한 숙소제공은 물론, 공장 한쪽에 당구대까지 설치하여 여가생활까지 배려해 주었다. 회사의 세심한 배려 덕분이었을까? 초기 공채로 입사한 이들은 자신의 잠재적 역량을 폭발시켜 LG의 성장을 이끈 주역으로 활약했다.
1963년부터 신문 공고를 통한 공개채용이 실시되었고, 1965년부터는 락희화학과 금성사가 공동으로 하는 그룹 차원의 공개채용으로 확대되었다. 서류전형과 필기시험(영어,논문,전공과목,상식), 면접 및 신체검사의 3단계 채용 절차도 이때부터 국내에 정착되기 시작하였다. 그룹 공개채용은 1967년도에는 130명 모집에 1,038명이 지원할 정도로 해가 갈수록 큰 호응을 얻었으며, 이후 다른 기업에도 확산되었다.
'LG 역사와 경제' 카테고리의 다른 글
LG의 역사 연재14편] 사회 정의를 지킨 사람들을 기억하고 배려한다. (0) | 2018.04.23 |
---|---|
LG의 역사 연재13편] LG인 육선의 요람, 인화원 (0) | 2018.04.23 |
LG의 역사 연재10편] 다양한 뷰티 브랜드로 글로벌 시장 석권을 노리는 LG생활건강 (0) | 2018.04.18 |
LG의 역사 연재9편] 궁중의 비책을 담은 궁중화장품 '후'의 부상 (0) | 2018.04.18 |
LG의 역사 연재8편] 제2의 도약, 그러나 화장품 시장 전면 개방으로 위기에 직면하다. (0) | 2018.04.17 |